신학기 무렵,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올해 수능을 영역별 만점자가 1%에 이르는 ‘쉬운 수능’으로 출제하겠다는 입장을 공고히 하면서 난이도에 민감한 영향을 받는 상위권 학생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진영, 노이즈, 잼, 이무송 같은 요즘 대학생들은 도저히 모를 가수들이 가요 프로그램 1위를 석권하던 1993년에 처음으로 실시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첫 해에 한해서 두 차례 실시되었기 때문에, 올해 드디어 20번째 시험의 역사를 쓰게 된다. 증권 시장 개장 시각이 늦춰지고, 비행기도 듣기 평가 시간 눈치를 보고 떠야 할 만큼,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시험이기에, 쉬우면 쉬운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문제가 되는 것이 수능 난이도다.
사실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수능 난이도가 문제되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간 해가 거의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이 2000년(01 수능)과 2007년(08 수능)이다. 둘 모두 수능 시험이 쉽게 출제된 해였는데, 전자의 경우 수능 만점자가 66명에 이르렀고, 결국 그 중 한 명이 정시모집에서도 서울대에 떨어지는 전무후무한 일이 있었다. 후자의 경우 표준점수 폐지 및 등급제 전면 실시로, 수리 영역에서 한 문제만 틀리고 나머지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음에도 하위권 의대에 원서를 낼 수 없는 경우와 같은 당혹스러운 사례가 빈출했고 결국 이듬해 표준점수제가 부활했다.
쉬운 수능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데, 하나는 철학적인 면에서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수학적인 면에서의 문제다.
철학적인 면에서의 문제는 시험을 왜 치르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수능 시험의 난이도가 높아지면 상위권 학생들 간의 미묘한 실력차이를 변별할 수 있게 되고, 학생 개개인의 학력을 낱낱이 해부할 수 있는 반면, 수능 난이도의 칼끝이 무뎌지면, 학력보다는 시험 당일의 컨디션과 집중력, 운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수능이 쉬웠던 해에는 십중팔구 신문지상에서 ‘실력차가 아니라 실수차’ 같은 헤드라인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한편 지나치게 높은 수능 난이도는, 실증된 적은 없지만, 공교육을 고사시키고 사교육 시장을 자극하며, 가계 지출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당이나 여당에게는 수능 난이도를 낮추려는 유인이 부여되고, 결국 장관이 만점자 1% 운운하게 되는 것이다.
수학적인 면에서의 문제는 표준점수 제도와 관련된 것인데, 2004년(05학년도) 이후의 수능 시험부터 탐구 영역에서 동일 계열 내의 모든 학생이 공통으로 응시하는 시험 문항이 사라지면서, 서로 다른 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 간의 실력을 비교하기 위해 원점수가 사라지고 표준점수가 전면으로 대두되면서 생긴 문제이다. 표준점수 제도는 이론적으로 학생들의 시험 점수 분포가 정규분포에 가까울수록 왜곡이 적어지고,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게 되는데, 그러려면 시험 문제들의 난이도 분포가 고르게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전체 문제의 1/5는 아주 어렵게, 1/5는 다소 어렵게, 1/5는 중간 난이도로, 1/5는 다소 쉽게, 1/5는 아주 쉽게 출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시험 문제가 일방적으로 쉽게 출제되면 1~2등급에서, 일방적으로 어렵게 출제되면 8~9등급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8등급 학생과 9등급 학생을 변별하는 것보다 1등급 학생과 2등급 학생을 변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려운 수능보다는 쉬운 수능이 문제가 된다.
그런 문제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2005학년도 수능 탐구 영역에서의 윤리 과목이나 2001학년도 수능 제2외국어 영역에서의 독일어 과목이다. 전자의 경우 만점자가 17.4%에 이르러서, 만점을 받고도 백분위가 92%가 나오고, 2점짜리 한 문제를 틀리면 3등급을 받게 되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만점자가 무려 절반에 이르렀는데, 당시 등급제가 실시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요즘 같았으면 1점짜리 한 문제를 틀리고 5등급 성적표를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위권 학생들은 다른 영역 시험을 아무리 잘 봐도 쉽게 출제된 과목에서의 실수 한 문제로 목표 대학에 원서를 넣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현명한 독자는 쉬운 수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위와 같은 불우한 사례로부터 이미 추론했을 것이다. 즉, 쉽게 출제된 과목에서는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능 출제 위원들이 작심하고 시험 난이도를 어떤 방향으로 조정하겠다고 하면, 시험의 변동성이 대단히 커지는 경향이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만점자가 66명에 이르렀던 01 수능에서도 출제 위원들이 ‘작년보다 조금 더 쉽게 출제한다’는 입장을 공연히 밝혔었고, 이렇게 쉬운 난이도가 사회문제로 불거지자 이듬해 출제 위원들은 ‘작년보다는 변별성을 갖출 수 있게 시험 난이도를 다소 조정하겠다’고서는 400점 만점 시험에서 평균 67점을 떨어트려 수험생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이미 천명된 ‘쉬운 수능’에서도 화룡점정 격이 되는 정말 쉽게 출제된 과목에서는 만점자가 10%를 넘어서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과목에서는 만점을 받아도 백분위 점수가 나쁘게 나오기 때문에, 그 과목을 선택한 것 자체가 원죄가 되어 명문대 최상위 학과 지원에 제약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건 수험생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다만 수험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과목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다. 쉬운 과목에서 2점 짜리 한 문제만 틀리더라도 명문대에서 반영하는 대학 자체의 변환표준점수가 그 과목에서 급감하게 되어 언어, 수리, 외국어 같은 주요 과목에서 3~4점 짜리 문제를 틀린 것보다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다. 특히 시험 난이도가 낮아지면 명문대 지원자들은 반영 과목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기 때문에, 명문대를 고집하는 수험생들은 그런 실수 하나 때문에 재수, 삼수로 직행하는 비극도 겪는다.
쉬운 수능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세 가지 정도 대비를 할 수 있다.
첫째는 수능 시험이 2~3주 내로 임박하면 매일 전과목 모의고사의 0.5회 분량 정도를 풀면서 자신있는 과목에 대한 감도 유지시키는 것이다. 특히 상위권 수험생들은 1~2과목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과목에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는 경우가 많아, 수능 시험이 가까워져도 실점을 하는 소수의 과목에 집중하고, 특히 외국어나 수리 영역과 같이 흔히 고득점을 받는 과목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흔한데, 감을 잃은 상태에서 실제 수능 문제를 접하면 시간 관리에 실패하거나, 4/9를 2/3으로 약분하는 것과 같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둘째는 같은 문제를 다양하게 풀어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시험 난이도가 쉬워지면 시험 문제를 다 풀고도 1/3 이상의 시간이 남는 경우가 흔해진다. 수리나 과학탐구 같이, 한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거나 답에서부터 문제로 거꾸로 풀어나갈 수 있는 영역이나 과목들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 값을 산출하고, 기존의 결과와 교차 검증함으로써 우연히 발생한 실수들을 잡아낼 수 있다. 학생들은 흔히 ‘다 아는 문제인데 실수로 틀렸다’고 말하는데, 어떤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는 일부 학생들은 그러한 실수까지 잡아낼 수 있는 메커니즘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는 데에도 시간과 노력이 듦은 물론이다.
셋째는 성격이나 공부 습관 자체를 어느 정도 바꾸는 것이다. 흔히 성격이 급하다고 하는 학생들이나,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학생들 중 일부는 덜렁대거나 서둘러서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학생들은 명상이나 요가를 하거나, 일부 차분한 종교 행사 같은 것들이 도움이 된다. 반대로 너무 소심한 학생들은 쉬운 문제들 중에 어렵게 느껴지는 문제가 섞여있을 때 그 난이도 차이가 크게 느껴져서 갑자기 당황하고 시간 관리에 실패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가슴이 두근거릴 때 다시 평온을 찾을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시험 때마다 기능성 설사를 앓거나, 발한증, 심계항진 등을 겪는 학생들은 미리 내과 혹은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고, 필요하다면 수능 시험이 약제를 투여하는 첫 번째 경험이 되지 않게 해두는 것이 좋다. 공부를 할 때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듣는 학생들도 많은데, 시험을 2~3개월 앞두고서는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는 습관을 중단하는 편이 득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최근에 들은 신곡의 가사가 수능 시험 내내 귓가에서 울리는 느낌을 받게 되어, 집중력이 떨어지고 결국 쉬운 문제에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수능 역사상 가장 쉬운 난이도로 출제되었던 01 수능이 끝난 후, 390점대 고득점 학생들이 자구책을 찾기 위해 개설된 사이트가 오르비스 옵티무스인 만큼, 오르비와 쉬운 수능은 악연으로 끈끈하게 뭉쳐진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수능 시험의 영향력이 떨어지고, 객관성이 부족한 전형 요소들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 최근 10년 동안 대학 입시가 변해온 방향이다. 그 기저에는 점수 1~2점 차이로 누구는 합격하고 누구는 불합격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주장이 있다.
1점이 아니라, 0.001점 차이로 누구는 합격하고 누구는 불합격하더라도 그 점수 차이가 계산된 방법과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다면 문제가 없고, 결국 피험자를 설득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점이 그렇게 보기 싫다면, 전형 총점에 10이나 100을 곱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의학전문대학원 전환 후 특차 입학이나, 일부 수시 모집 전형과 같이, 1~2점 차이를 산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성이 훼손되고, 비리가 양산된 사례가 그간 얼마나 많았는가?
수능 시험은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들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문제로, 거의 동일한 환경에서 시험을 치르며 학력을 경쟁하는 유일한 시험이며, 그런 점에서 가장 공정한 전형 요소이다. 학습 환경의 평등이 구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능 성적만으로 모든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이 불공정한 면이 있다면, 취약계층을 우대하는 보조적인 전형 방식에 정원의 일부를 할당하여 보완하거나, 열악한 학습 환경을 개선하는 데 복지예산을 투입함으로써 취약계층의 학력 자체를 높이는 방향으로 대책이 마련되는 것이 옳다.
2000년에는 90%의 수험생들을 수능 성적으로 뽑았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나니 20%의 수험생들만 수능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한다. 입학사정관제니 쉬운 수능이니 허울 좋은 말을 하지만 그 과실을 어떤 계층이나 집단이 얻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라. 우리는 공정하지 않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수능 시험을 앞두고 행운을 빈다거나 대박을 기원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운이라는 건 공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해 쉬운 수능에서, 모든 수험생이 자신의 학력만큼만의 결과를 얻게 되는, 정말 ‘운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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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웹진 오르비' 1호에서 발췌된 오르비 전 대표 운영자 이광복님의 글입니다.
에휴.. 진짜 어떻게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아니라 수학능력시험특기자전형으로 바꿔야할듯...
힘드네 ,,